티스토리 뷰
목차
“아파트가 곧 권력이다” – 자산 불평등이 생존을 결정하는 구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서울을 배경으로, 단 한 채 남은 황궁아파트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극을 그린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재난 상황이 아니다. ‘누가 살아남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누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명확하다 – 자산의 유무, 다시 말해 ‘이 아파트의 입주민인가 아닌가’다.
영화 속 황궁아파트는 붕괴되지 않고 남은 유일한 공간이다. 추위와 폭력, 약탈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처이자, 동시에 권력의 중심이다.
건물이 멀쩡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아파트의 입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안’과 ‘밖’을 가르기 시작한다.
결국 거주권은 생존권이 되고, 생존권은 곧 권력이 된다.
이 구조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겪어온 부동산 중심 자본주의의 축소판과도 같다.
아파트를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내부자와 외부자, 보호받는 자와 쫓겨나는 자.
영화는 재난이라는 비상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부동산 소유 여부가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현실에서도 ‘자산’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 접근 가능한 정보, 안전망, 네트워크를 모두 포함하는 구조적 권력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 현실을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확대해 보여준다.
정전되고 통신이 끊기고, 법과 질서가 사라진 순간에도, 아파트는 여전히 ‘프리미엄’을 갖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프리미엄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블록체인이나 코인 경제와도 연결해 해석할 수 있다.
탈중앙화와 분산화라는 이상이 있지만, 결국 거점(노드) 확보자, 초기 유동성 보유자, 정보 접근자가 시장을 주도한다.
마치 재난 속의 아파트처럼, 기회의 ‘초기 진입자’가 구조를 지배하는 현실은 여기서도 반복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묻는다.
“진짜 재난은 지진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드러난 사회 구조가 아닐까?”
그리고 경고한다.
‘아파트’라는 콘크리트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를 상징하는 탑이다.
“누구를 쫓아낼 것인가” – 재난 속 분배 정의와 권력의 탄생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이후의 사회가 어떻게 빠르게 분열되고, 또 어떻게 권력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무정부 상태의 혼란보다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더 날카롭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처음엔 모두가 서로를 도우려 하지만,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점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경계선은 자의적이면서도 아주 치밀하게 형성된다.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빠르게 임시 리더를 선출하고, ‘공동체 운영’을 위한 규칙을 세운다.
그러나 그 규칙은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다수의 이익을 중심으로 약자를 배제하는 구조로 향한다.
처음엔 ‘이곳에 오래 살았는가?’가 기준이었고, 그 다음엔 ‘기여하고 있는가?’로 변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가?’라는 감정적 기준이 작동하며,
결국 쫓아낼 사람을 정당화하기 위한 규칙의 폭력이 드러난다.
이 구조는 자본주의 사회, 특히 위기 상황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자원은 제한적이고, 생존의 기회는 줄어들며, 사람들은 ‘공정한 분배’보다 ‘내 몫의 보전’을 먼저 생각한다.
결국 공존을 위한 규칙은 배제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공동체는 점점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권력 집단으로 변화한다.
이 장면은 현실 속 경제 시스템에도 정확히 대응된다.
투자 시장, 특히 암호화폐나 주식시장에서 손실이 발생했을 때 누가 구제받고, 누가 퇴출되는가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초기 투자자, 내부 정보 보유자, 네트워크가 있는 사람은 위기에서도 회생하지만, 막차를 탄 개인 투자자나 시스템 바깥의 이들은 언제든지 ‘리스크 요인’으로 분류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결국 묻는다.
“우리는 진짜 공정한 세상을 바라는가, 아니면 내가 속한 안전지대만 유지되길 바라는가?”
재난이 가져온 혼란은 결국 권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기득권의 자기 방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재난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 인간 안에 숨겨진 구조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쉽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한다.
“이게 진짜 유토피아일까?” – 생존경제가 만든 신계급 사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제목부터 아이러니하다. 유토피아는 이상향을 뜻하지만, 영화 속 아파트는 생존을 빌미로 한 신계급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 아파트는 물리적 구조물인 동시에, 철저히 폐쇄된 권력 시스템이다.
입주민과 외부인을 구분하고, 내부에서도 기여도에 따라 서열이 생긴다.
아파트라는 공간 안에서 가상의 계급이 형성되고, 그것은 곧 누가 더 오래, 더 편안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결정짓는다.
이 구조는 현실의 생존경제와 다르지 않다.
재난 상황에서 식량, 물, 전기 같은 필수 자원은 한정되고, 그것을 통제하는 집단이 곧 지배자가 된다.
그런데 이 자원은 우연히 아파트에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 소유를 정당한 권리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이 영화의 핵심이다.
재난 이후의 세계는 오히려 평등이 아니라, 더 치열하고 잔혹한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사실.
이 현상은 오늘날 암호화폐 시장이나 자본시장, 나아가 부동산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초기 진입자, 정보 보유자, 시스템 내 위치자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그 안에서 ‘정상 투자자’와 ‘위험군’이 구분되며,
이른바 탈중앙화된 자유시장조차 새로운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영화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생겨난 ‘작은 사회’가 얼마나 쉽게 폭력적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엔 공동체였지만, 나중엔 지도자를 따르는 전체주의로 변하고,
끝내 그것은 공포와 배제, 자기방어로만 유지되는 무리가 된다.
이는 ‘공존’이라는 이상이 극한의 생존 앞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말한다.
“우리가 만든 유토피아는 진짜 살고 싶은 곳인가?”
그 질문은 곧 오늘날 우리가 만들고 있는 사회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가상자산 시장이든, 부동산이든, 투자든 —
모두가 원하는 건 자유롭고 평등한 기회지만, 현실은 그 반대의 결과를 만든다.
결국, 유토피아는 이상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누구를 들이고, 누구를 내쫓을 것인가.
그 기준이 정의가 아니라 이익이 되는 순간,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바뀐다.
'경제 영화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인사이드 더 옐로 코쿤 셸 Inside the Yellow Cocoon Shell Bên trong vỏ kén vàng》 리뷰 – 도시화 시대의 정체성 혼란과 성장 경제의 그림자 (0) | 2025.05.12 |
---|---|
영화 《고주일척 No More Bets》 리뷰 – 가짜 수익률, 진짜 지옥: 디지털 투자 사기의 민낯 (1) | 2025.05.11 |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 리뷰 – 자립의 무게와 여성 청춘의 경제학 (0) | 2025.05.10 |
영화 《컨피던스맨 JP: 로맨스편》 리뷰 – 믿음과 사기의 경계, 금융 사기극이 던지는 메시지 (1) | 2025.05.10 |
영화 《성난 황소》 리뷰 – 고리대금의 덫, 폭력이 된 돈의 실체 (0) | 2025.05.09 |